나는 왜 제약회사 약사가 되었나?_리냑의 약사로그
제약회사 약사로 산다는 것에 이어서. 졸지에 시리즈가 되버렸네.
이번 편은 제약 회사를 오게 된 계기.
결론부터 말하면 회사 약사가 된 이유는 너무 늦게 시작해버린 진로 고민 덕분이다.
어렸을 때부터 의료인인 사촌 형제들 사이에서 둘러 쌓여 자라게 되면 자연스럽게 대학 진학 선택의 폭이 좁아지게 된다.
물론 이런걸 다 깨버리는 범인이 있을 수는 있겠으나,
애석하게도 나는 특출나지도, 용기 있지도, 심지어 똑똑하지도 않아서 약대에 진학하게 된다.
결국 다른 사람들이 어렸을 적 부터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는 것과 달리 나의 자아는 약대에 입학 후에 형성되기 시작하는 결과를 낳는다.
게다가 물 흐르듯이 약대에 와보고 나니 의외로 약이 좋고 약사가 롤모델인 그런 학생이였으면 좋았겠지만 나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것까지 완벽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비약학 전공인 친구들을 쫓아다니며 친구들의 파격적인 대학생활을 듣는게 좋았다.
약대에 입학하게 되면 자연스레 접하게 되는 짜여진 시간표, 그 속에서 배우는 약, 그리고 페약이니 개국이니 하는 것들에 다소 지쳐버렸던 것 같기도 하다.
학기 내내 그것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바둥 바둥 댔고, 그게 교수님들 눈에도 보일 판이였으니,
졸업 후 뵈러간 교수님들이 '너는 회사로 갈 줄 알았다' 말씀하시는 것도 빈말은 아니였다.
그 바둥바둥 속에서 뭐 하나 빛나는 걸 찾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나마 고등학교 때부터 해오던 블로그와, 남들 보다 독서를 좋아한 덕에 글로 돈 몇 번 벌어 본 것 외에는 탈출구를 찾지 못했다.
어찌 보면 슬픈 결말이지만 다행히도 그 속에서 해온 잡식들, 기획, 춤, 중국어, 작가, 기자, 주식, 셀프케어 그리고 심지어 종교까지 볶음밥 속에서 야채를 골라내듯 관심있는 것, 관심은 있으나 재능은 없는 것, 관심 없는 것 까지 적당히
추려낼 수 있었으니 성과가 있다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 덕에 연락이 닿은 후배에게 잡다한 것 해보라고 꼰대같은 한마디도 해줄 수 있었다. 그거까지 더한 다면 더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 여전히 약학 전공자 외의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재밌었으니 회사를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였을 것이다.
배운게 도둑질 뿐이라고 그래도 남는게 약학 학사라 결국 크게 벗어나진 못했다.
졸업 후 새로운 것을 배울까 도둑질을 할까 고민하다 결국 도둑질을 택한 슬픈 도둑의 이야기지만.
그래도 일반 제약사는 안쓰고 대기업 계열사, 약학 학사를 요구하는 화장품 회사, 식품회사, 온갖 회사를 다 골라서 썼었다.
이 때의 경험은 약학 학사가 단순히 약사 면허를 위한 직업이 아니며 제약 산업 외에도 할 수는 있겠다. 하는 인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얼마전에 헤드헌터로부터 받은 메일은 화장품 회사였다.
물론 현명하지 못한 나와 달리 이쪽 길을 가고 싶다는게 정해지면 이 글을 읽는 그대들은 입학부터 준비하길 바란다.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회사가 밝혀지고 신상이 털리는 건 전혀 원하지 않는 일이라 어디에 입사하게 되었는지는 밝히지 않겠지만
그 중에서 열심히 준비한 덕에 운 좋게 회사 약사로서의 삶이 시작 되었다.
면허를 쓰는 부서도 아니여서 약과 약사를 벗어나겠다는 학창시절의 몸부림이 반은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다만 아쉬운 건 여전히 제약 산업이라는 한계점이 있겠지만.
며칠전에 회식을 하면서 타팀 대리님이 누군가 직업을 물어보면 회사원이라고 대답하느냐 약사라고 대답하느냐 물어보셨다.
의도가 담긴 질문은 아니고 순수한 궁금증이였지만 어쩐지 쑥스러워졌다.
그렇게 약학을 벗어나고 싶다고 말해놓고 직업을 물어보는 질문에는 약사라고 대답하는 내 모습이 일종의 속물처럼 느껴져서였을까.
적어도 '제약'산업에서는 '약사'로 살고 싶은 마음은 있다. 그래도 배운 도둑질을 하는 도둑이라고 이기적으로 항변하고 싶다. 비겁하게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니까. 다만 언젠가는 약사가 메리트가 아닌 산업군에서 최선을 다해서 일해보기를 소망한다.
당당하게 약사 아닌 직업을 말해 보고 싶다.